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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가자가 아내나 남편의 위험에 대해 말하길 꺼리는 이유

지혜가 출중한 재가불자들도 아내나 남편의 위험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길 꺼린다. 경전에서 이성의 위험에 대해 수차례 경고하는데도 말이다. 이것은 그들의 신심이나 지혜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붙잡고 있는 감각적 욕망이 너무나 깊어서, 지혜가 그것과 대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눈 앞의 적이 너무나도 강할 때, 어떻게든 싸우지 않을 핑계를 꾸며대는 것과 같다. 지혜가 없는 사람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이성으로 인해 혹독한 괴로움을 겪었다. 나의 선생님은 무상하고 괴롭고 통제할 수 없는 ‘예쁜 것’에 가치를 뒀기 때문에 내가 이런 처지에 당하게 됐다고 말씀하셨다. 반만 맞는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예쁘지 않은 것’에도 얼마든지 당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예쁘지 않은 것’에 상처받는 일이 ‘예쁜 것’에 상처받는 일보다 드문데, 그건 그저 해를 끼칠만한 능력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간단한 진실을 외면하기 위해 이 말을 하는 메신저를 증오하고 때로는 모욕한다. 나는 그들이 왜 그렇게 하는지 그들 자신보다 더 잘 안다.)


예쁘거나 예쁘지 않거나 욕망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똑같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훌륭한 사람이란 지혜와 신의가 있는 사람이다. 그것은 외모와 상관이 없다. 게다가 지혜롭게 처신하고 신의로 욕망을 길들이는 사람은 세상에 손에 꼽는다. 10명 중 1명, 100명 중 1명 수준이 아니다. 사람들은 늘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산다. ‘할 수 없음’을 ‘할 수 있는데 하지 않음’이라고 포장한다. 그조차 지혜없음과 용기없음의 반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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