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호흡명상이 별로 잘 되지 않는다. 그리고 잘 하지 않는다. 현시점에서 분석해보니 대략 세 가지 이유다. 명상 자체에 대한 동기 감소, 감각적 욕망에 휩쓸림, 피로감. 먼저 피로감부터 정리해보려고 한다.
문제의 뿌리: 25년 된 습관, 잠 안자는 밤
나는 수면 관리를 해야 한다.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것은 잠을 늦게 자기 때문이고, 늦게 자는 이유는 감각기관으로 즐거운 대상을 탐닉하려는 욕망에 매번 지기 때문이다. 탐욕의 종류와 대상은 늘 같지는 않지만 패턴은 있다. 99년부터 거의 늘 그래왔다.
피로가 피워내는 두 가지 독버섯: 성냄과 해태
수면 부족으로 인해 피로가 오면 마음에 성냄이 안개처럼 깔린다. 평소 탐욕과 진심이 일어날 때마다 계수기로 체크를 하는데, 잠이 부족한 날은 언제 눌러야 할지 모를 정도로 짜증과 성냄이 몸 전체에 퍼져있다. 성냄은 그 자체로 불선법(不善法)일 뿐만 아니라 사띠의 질을 현저히 떨어뜨린다. 여기에 해태와 혼침까지 동반된다. 결국 수면 부족이라는 하나의 뿌리가 선정을 방해하는 다섯 가지 장애 중 성냄과 해태라는 두 가지 장애를 키워내고 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글로 쓰면서 심각성을 다시 느낀다.
팔정도 안에서 길을 찾자
팔정도 안에서 분명히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어떤 항목과 관련되는지 검토해보니 정견과 정념, 정정진이 모두 관련된다. 피로라는 장애를 알아차려야 하고(정념), 이것이 해탈과 열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견해가 바로 서야 한다(정견). 맞는 얘기다. 그런데 정정진이 좀 더 직접적이다. 바른 노력(정정진)이란 이미 일어난 해로운 법을 제거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해로운 법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며, 이미 일어난 선한 법을 증장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한 법을 일으키는 것이다(SN 45.8). ‘놀고 싶은 유혹(감각적 욕망)’은 이미 일어났거나 일어날 수 있는 해로운 법이며, ‘충분하고 편안한 잠’은 일으켜야 할 선한 법이다.
유혹의 달콤함과 위험을 꿰뚫어 보기
부처님께서 알려주신 정정진의 틀로 해결책을 찾아보자면 이렇다.
이미 일어난 해로운 법(놀고 싶은 유혹)을 버리기 위한 노력
① 먼저 놀고 싶다는 욕구를 사띠로서 알아차려야 한다. (사띠는 대상을 비추는 조명과 같고 아는 것은 의식의 역할이지만, 편의상 ‘사띠로 알아차린다’고 표현한다). 이것은 심념처(心念處) 수행에서 ‘탐욕이 있는 마음을 탐욕이 있는 마음이라고 알아차리는 것’과 같다. 먼저 알아차려야만 욕망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고, 그것을 하나의 대상으로 삼아 다룰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은 이 자체로 바른 사띠이기도 하다. 일단 알아차려야 동기화되지 않고 대상으로서 어떤 조치를 할 것 아닌가.
② 부정적인 결과를 명상해야 한다. 아디나와-아누빳사나(Ādīnava-anupassanā)라고 한단다. 나도 글을 준비하면서 처음 알았다.
- 아디나와 (Ādīnava): ‘위험’, ‘재앙’, ‘불이익’, ‘해로움’, ‘부정적인 결과(drawback, danger, disadvantage)’를 의미합니다.
- 아누빳사나 (Anupassanā): ‘따라가며 봄’, ‘반복적인 관찰’, ‘지속적인 통찰(contemplation, repeated observation)’을 의미합니다. ‘사념처 수행’에서 ‘념처(paṭṭhāna)’와 함께 쓰이는 ‘관(passanā)’과 같은 어근을 가집니다.
“위험(해로움)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 또는 “부정적인 결과를 반복하여 통찰함” 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아싸다(assāda, 달콤함)’와 대비하여 그 위험(ādīnava)을 보는 것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하셨다.
“비구들이여, 만약 세상에 달콤함(assāda)이 없었다면, 중생들은 이 세상에 탐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달콤함이 있기에, 중생들은 세상에 탐착한다.”
“비구들이여, 만약 세상에 위험(ādīnava)이 없었다면, 중생들은 이 세상에서 염오(厭惡, 환멸을 느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위험이 있기에, 중생들은 세상에서 염오한다.”
“비구들이여, 만약 세상으로부터의 벗어남(nissaraṇa)이 없었다면, 중생들은 이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으로부터의 벗어남이 있기에, 중생들은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 (AN 3.101 Loka Sutta, 세상의 경)
나의 경우에는 이렇게 반복해서 통찰해야 한다. “이 유혹에 굴복하면, 내일 아침 머리가 무겁고 하루 종일 피곤할 것이다.” “명상에 앉아도 혼침에 빠져 시간을 낭비할 것이다.” “깨어있음의 힘이 약해지고, 나의 해탈이라는 목표에서 멀어질 것이다.” 라고. 타이핑 하면서 느낀 것인데, 부처님의 교법에는 빈틈이 없다.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체계를 갖추고 있다.
유익한 법(충분하고 편안한 잠)을 일으키고 증장시키기 위한 노력
제미나이가 추천해준 방법은 자애명상, 가르침에 관한 책 읽기 이런 것이다. 그런데 나는 수면 자체에는 문제가 없고 감각적 욕망의 달콤함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 지금 상황에서는 필요 없다.
라고 초안을 작성했으나 제미나이가 읽어보더니 이렇게 말한다.
“‘놀고 싶은 유혹’이라는 강력한 습관을 단순히 ‘하지 않는’ 노력만으로 이기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마음은 진공을 싫어하기에, 무언가를 빼내면 그 자리를 다른 무언가로 채워야 합니다. 이때 자애 명상이나 가르침에 대한 독서는 ‘잠들기 위한 기술’이라기보다는, ‘감각적 욕망이 차지하고 있던 마음의 공간을 더 고요하고 유익한 대상으로 채우는 적극적인 대체 과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놀이’라는 불선법(不善法)을 밀어내기 위해, ‘자애’와 ‘법에 대한 환희’라는 강력한 선법(善法)을 마음으로 불러오는 것입니다. 이는 정정진의 ‘유익한 법을 일으키는 노력’과 정확히 일치하며, ‘해로운 법을 버리는 노력’을 훨씬 수월하게 만들어주는 지혜로운 전략이 될 수 있습니다.”
숙고해보니 맞다. 맞는 이야기다.
가르침의 길, 수행의 길
포스팅을 준비하면서 몰랐던 경전도 알게 되고 바른 노력의 일환으로 어떻게 놀고 싶은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지 알게 됐다. 어차피 평생 가기로 한 수행의 길이다. 달콤함 뒷면의 위험함을 본다. 위험함을 보고 다시 달콤함으로 돌아가더라도 또 다시 위험함을 본다. 보아야 한다. 선정 수행과 마찬가지로 이번 생에 안되면 다음 생에 이어서 하면 된다. 부처님 가르침을 떠나서는 어차피 생은 영원히 계속된다. 가르침대로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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