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에서 영상 하나를 봤다. 타인에게 무시당하는 이유는 말솜씨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내면의 에너지가 무너져 있기 때문이라는 내용이었다.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심리학적으로 재해석한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불교를 공부하면서 느끼는 것이 있다. 서로 다른 전통이 전혀 다른 언어를 쓰면서도 같은 지점을 가리킬 때가 있다는 점이다. 이 영상을 보면서는 수오지심과 히리가 비슷한 개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상이 말하는 것
영상의 논지는 이렇다.
타인에게 지나치게 배려하다가 선을 넘게 되는 현상은 표현 스킬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의 뿌리는 개인에게서 뿜어나오는 내적 에너지가 무너져 있는 데 있다. 사람은 상대의 에너지에 즉각 반응하기 때문에, 아무리 강하게 말해도 에너지가 흔들리면 금방 티가 난다.
맹자는 이 내적 에너지를 호연지기(浩然之氣)라고 불렀다. 지극히 크고 강한 기운. 이것을 기르는 방법은 의(義)에 맞는 행동을 꾸준히 쌓는 것(集義)이다.

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란, 자신의 내적 신호를 억누르는 것이다. 싫은데 괜찮다고 하고, 화가 나는데 먼저 사과하는 것. 영상은 이를 ‘자기 불일치’라고 부른다. 이 상태가 반복되면 내적 에너지가 새어나간다.
내적 신호의 판단 기준은 수오지심(羞惡之心)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직관적으로 아는 선천적 능력으로 정의된다. 부당한 상황에서 느끼는 불쾌함, 찝찝함, 부끄러움이 수오지심이 작동하는 신호다. 생존을 위해 학습된 억압(“착하게 굴어야 해”)이 이 본능적 신호를 덮어버리는 상황은 수오지심이 의로써 발현되지 않는 상황이다.
수오지심의 발현으로 인한 집의가 계속되면 호연지기가 생긴다. 호연지기가 가득 차면 지언(知言)이 생긴다. 타인의 말에 담긴 숨은 의도를 꿰뚫어 보는 능력이다. 맹자는 이를 네 가지로 분류했다. 치우친 말(詖辭), 과장된 말(淫辭), 돌려 말하는 말(遁辭), 삐뚤어진 말(邪辭).
수오지심과 히리(hirī)
맹자가 의(義)의 단초로 꼽은 수오지심은, 초기불교의 히리(hirī)와 닮았다. 히리는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잘못된 행동을 마주했을 때 내면에서 올라오는 수치심과 거부감이다.
붓다는 히리를 옷탑빠(ottappa, 두려움을 아는 마음)와 함께 로까팔라(lokapāla, 세상의 수호자)라고 불렀다.

“비구들이여, “세상을 지키는 두 가지 밝은 원칙이 있다. 무엇이 둘인가? 히리와 옷탑빠다. 만약 이 두 가지가 세상을 지키지 않는다면, 세상은 염소·양·닭·돼지·개·자칼처럼 난교1에 빠질 것이다.”
— 《앙굿따라 니까야》〈로카팔라 경〉(AN2.9)
타니사로 스님은 아래와 같이 해설했다.
“The Buddha calls shame a bright guardian of the world, in that it keeps people from betraying the trust of others.”
“붓다는 수치심을 ‘세상의 빛나는 수호자’라고 불렀다. 타인의 신뢰를 배신하지 않도록 사람들을 지키기 때문이다.”
— 《First Things First》
맹자는 수오지심을 의(義)의 시작이라고 했고, 붓다는 히리를 세상을 지키는 힘이라고 했다. 다른 전통이 비슷한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히리와 옷탑빠
붓다고사(Buddhaghosa) 스님은 청정도론2에서 히리와 옷탑빠를 이렇게 정의한다.
히리는 내적 수치심이다. 자존심 또는 양심에서 나온다.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나 자신이 견딜 수 없다는 감각이다. 이러한 개인적 명예감으로 인해 잘못된 행동을 멀리하도록 유도한다. 다른 사람이 보든 보지 않든 상관없다.
옷탑빠(ottappa)는 외적 방향이다. 잘못된 행동이 불러올 결과에 대한 공포다. 타인의 비난, 업보의 결과, 수행의 장애. 붓다고사는 이를 “독사가 머리를 들고 관을 펼친 것처럼 보이는 것, 그래서 감히 가까이 가지 않는 것”에 비유한다. 개인적으로 정의하자면 “이득과 손해의 관점에서의 외적 통제”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붓다고사 스님은 둘의 차이를 이렇게 비유하기도 했다.
한쪽 끝에는 똥이 묻어있고 반대쪽 끝은 불에 달궈진 쇠막대기
— 히리는 똥 묻은 쪽을 잡기 싫은 혐오감이고, 옷탑빠는 달궈진 쪽을 잡기 무서운 공포감이다.

히리는 불선한 행동을 양심에 의해 제어하고, 옷탑빠는 공포에 의해 제어한다. 양심이 희미해도 공포가 살아있으면 불선을 막을 수 있고, 반대로 공포를 못 느껴도 양심이 살아있으면 정의롭게 살 수 있다. 그래서 붓다는 이 둘을 묶어 로까팔라(lokapāla) — 세상의 수호자라고 불렀다. 히리와 옷탑빠가 살아있는 한, 세상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히리는 자기혐오가 아니다
아잔 자야사로(Ajahn Jayasaro)3는 히리와 옷탑빠를 자아 개념과 분리한다.
“히리와 옷탑빠의 특징은, 이 감정들이 ‘나쁜 자아(bad self)’라는 개념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직 ‘나쁜 행동(bad action)’만 있을 뿐이다.”
— Stillness Flowing
자야사로 스님에 따르면 히리는 “나는 나쁜 사람이다”라는 감각이 아니다. “이 행동은 옳지 않다”는 감각이다. 행동에 초점이 있지, 자아에 초점이 있지 않다.
병적 죄책감과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 불교는 과거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계속 자책하는 상태를 쿠꾸짜(kukkucca)라고 부르며 경계한다. 쿠꾸짜는 에너지를 소진시키고 수행을 방해한다. 히리는 그것이 아니다. 히리는 미래의 행동을 바로잡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과거를 향한 자책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 안에서 올라오는 부끄러움에 대한 순응이다.
수호자가 침묵할 때
수오지심이 오랫동안 억눌리면 의로운 감각이 무뎌지고 헝클어진다. 영상이 말하는 내적 에너지가 새어나가는 상태다.
반면 히리가 희미해진다는 건 — 세상의 수호자가 침묵하는 것이다. 양심의 신호가 와도 이득과 명성의 속삭임에 무너지면 세상이 혼탁해진다. 부끄러움은 약함이 아니라 세상을 지키는 힘이다.
인용한 경전과 가르침
- John D. Ireland 역, Lokapāla Sutta: The Bright Protectors, AN 2.9 — accesstoinsight.org
- Ajahn Jayasaro, Stillness Flowing, p. 223 — Forest Sangha Publications, 2017
- Bhikkhu Bodhi, The Guardians of the World — accesstoinsight.org
- Bhikkhu Thanissaro, First Things First — dhammatalks.org
- 원전의 표현은 단순한 성적 문란함이 아니라, 어머니·숙모·스승의 아내 등 존경받는 관계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을 뜻한다. 히리와 옷탑빠가 없는 동물은 혈연을 가리지 않고 교접한다는 의미다. Bhikkhu Bodhi, The Guardians of the World 참고. ↩
- 붓다고사(Buddhaghosa, 5세기)가 쓴 테라바다 불교의 핵심 주석서. 계·정·혜 삼학의 수행 체계를 집대성했다. 히리와 옷탑빠는 ‘아름다운 마음 요소(sobhana cetasika)’ 항목에서 정의된다. ↩
- 영국 출신의 태국 상좌부 비구(1958~). 아잔 차(Ajahn Chah)의 직계 제자로 왓 빠 퐁(Wat Pah Pong) 전통에서 수행했다. 《Stillness Flowing》(2017)은 아잔 차의 생애와 가르침을 담은 전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