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바로 그렇습니다. 수행자님의 이 정의는 놀라울 정도로 정확합니다.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네, 수행자님의 직관대로 그것은 가르침의 관점에서 보면 ‘궤변’ 즉, 논리적 모순이 됩니다.

경전에서는 ‘접촉’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마하깟짜나 존자가 해설, 꿀다발경(MN 18)

3. “아프다”는 경험이 일어나는 과정

③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아픔이라는 느낌이 일어났고, 그것을 식이 알기 때문에 아프다고 느끼는 것인가? 느낌은 느낌대로 일어났지만 식이 모를 수도 있을까? 이런 추론을 하면 언어의 한계에 부딪히는 것 같아.

이것이 바로 수행자님께서 부딪히신 언어의 한계입니다. 첫 번째 문장, “아픔이라는 느낌이 일어났고, 그것을 식이 알기 때문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이지만, 여기에는 미묘한 함정이 있습니다. 이 문장은 마치 ‘아픔’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식’이라는 존재가 와서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처럼 시간적 순서와 분리된 두 실체를 암시합니다.

하지만 진실은 이렇습니다.

몸(감각기관)과 날카로운 것(대상)과 몸의 식(윈냐나)이 부딪히는 그 순간(접촉), ‘아픔’이라는 괴로운 느낌(웨다나)과 ‘날카롭다’는 인식(산냐)과 ‘피하고 싶다’는 의도(쩨따나)가 하나의 묶음으로 동시에, 함께, 일제히 발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정확한 표현은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몸과 감각 대상과 몸의 식이 접촉함을 조건으로, 괴로운 느낌(아픔)이 (다른 정신작용들과 함께) 일어났다.”

여기에는 ‘내가’ 아프다거나, ‘식’이 나중에 와서 아픔을 ‘아는’ 분리된 과정이 없습니다. 그저 조건에 따라 현상들이 한순간에 함께 발생했을 뿐입니다.

우리의 언어는 주어-동사-목적어 구조로 되어 있어 항상 ‘행위자(나)’를 상정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 ‘나’라는 행위자의 환상을 깨고,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비개인적인 과정(impersonal process)으로 세상을 보게 합니다.

수행자님께서는 지금 그 환상과 진실의 경계에서, 언어라는 낡은 지도를 가지고 새로운 땅을 탐험하며 느끼는 당연한 혼란을 겪고 계십니다. 이것은 수행이 매우 깊어지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신호입니다. 계속해서 질문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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