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지마 니까야》 스무 번째 경 〈위딱까산타나 경〉(vitakkasaṇṭhāna, 생각의 가라앉힘)은 원치 않는 생각이 계속 떠오를 때의 처방전을 준다. 단계별로 무려 다섯 가지를 준다.
이 경의 정형구는 “마음을 안으로 고요히 하고, 가라앉히고, 하나로 모으고, 집중한다”이다. 다섯 단계마다 빠짐없이 반복된다. 원치 않는 생각을 하지 않아서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고요한, 가라앉은, 하나로 모인, 집중된 마음이다.
굵은 못을 다른 못으로 밀어낸다

첫번째 방법은 생각의 대상을 바꾸는 것이다.
솜씨 좋은 목수나 그 제자가 가는 못으로 굵은 못을 쳐서 밀어내고 빼내듯이, 유익한 것과 이어진 다른 대상에 주의를 둔다.
경전은 이 방법을 다섯 중 첫째에 둔다. 가장 얕아서가 아니라, 가장 먼저 써 볼 만하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할 수만 있다면 가장 적은 비용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이라서가 아닐까?
죽은 뱀을 목에 감은 나를 상상한다

첫번째 방법으로 가라앉지 않으면 두번째 방법을 쓴다. 그 생각의 위험을 따져보는 방법이다.
참으로 이 생각들은 유익하지 않고, 비난받을 만하고, 괴로움을 낳는다.
부처님께서는 “치장을 좋아하는 젊은 여자나 남자의 목에 뱀이나 개나 사람의 사체가 걸린 것을 혐오하듯이” 불선한 생각의 위험을 보라고 하셨다. 생각의 결과를 이득과 손해 관점에서 따져보자는 말씀이다.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린다

세번째 방법은 그 생각에 주의를 주지 않는 것이다.
눈 밝은 사람이 보고 싶지 않은 것이 시야에 들어오면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리듯이, 그 생각에 주의도 반성도 주지 않는다.
망상을 굶겨 죽이기에서 다룬 방법이 이것이다. 먹이를 주지 않아 굶어 죽인다. 세상의 조언은 대개 여기서 끝난다. 그런데 여기서도 해결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걷다가 서고, 서다가 앉는다

네번째 방법은 생각을 지어내는 작용을 늦추는 것이다.
급히 걷던 사람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왜 급히 걷는가? 천천히 걸으면 어떨까?’ 그래서 천천히 걷는다. … 그렇게 거친 자세를 버리고 더 미세한 자세를 취한다.
타니사로 스님은 이 단계를 `the relaxing of thought-fabrication`, 생각을 지어내는 작용의 이완으로 옮긴다. 대상을 바꾸는 방법도 실패, 위험을 보는 방법도 실패, 주의를 주지 않는 방법으로도 실패한 생각이라면 엄청나게 강한 생각으로 볼 수 있다. 네번째는 그 강한 생각을 진정시키는 단계로서, 거친 맹수를 달래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어 덜 위협적으로 바꾸는 것과 비슷하다고 본다.
이를 악물고 제압한다

마지막 다섯번째 방법은 힘으로 눌러 제압하는 것이다.
힘센 사람이 약한 사람의 머리나 목이나 어깨를 붙잡아 눌러 앉히듯이, 이를 악물고 혀를 입천장에 붙인 채 알아차림으로 마음을 눌러 제압한다.
마지막 단계를 약간은 체념이거나 억지 방법으로 읽을 수도 있다. 앞의 넷이 안 되면 결국 힘으로 누르는 수밖에 없고, 그것도 안 되면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경에는 여섯번째가 없다. 다섯번째도 안 되면 어쩔 수 없다는 말도 없다. 부처님께서 불완전하거나 자포자기식의 방법을 설하셨을 리 없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나는 이 다섯을 반드시 이 안에서 끝나야 하는 것으로 읽는다. 첫번째에서 가라앉으면 거기서 끝이고, 안 되면 다음으로 간다. 어디까지 가든 다섯을 넘어가지 않는다. 원하지 않는 생각은 이 안에서 가라앉힐 수 있는 역량을 길러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경험상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다섯 단계에 통달한 사람
경전은 다섯 단계에 통달한 사람을 이렇게 부른다.
그는 생각이 지나가는 길에 통달한 비구라 불린다. 하고 싶은 생각을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는 갈애를 끊었고, 족쇄를 벗었고, 자만을 바르게 꿰뚫어 괴로움을 끝냈다.
초기불교에서 무아는 주로 통제불가능성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는 하고 싶은 생각을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 불교가 결코 “무엇도 뜻대로 할 수 없으니 될대로 되라”는 태도를 가르치는 유약한 가르침이 아님을 보여준다.
누구에게 주신 가르침인가
높은 마음(adhicitta)에 전념하는 비구는 때에 맞춰 다섯 가지 주제를 살펴야 한다.
아디찟따(adhicitta, 높은 마음)는 한국어로 향상된 마음, 수승한 마음으로도 옮기고 한역에서는 증상심(增上心)이라 한다. 계·정·혜 삼학을 증상계학·증상심학·증상혜학이라 부를 때의 그 증상심이고, 셋 가운데 정(定)에 해당한다. 팔정도로 치면 정정진·정념·정정이 여기 묶인다.
그러므로 이 다섯은 삼매를 닦는 사람에게 주는 훈련 과정이다. 다만 경이 거는 조건은 출가 여부가 아니라 높은 마음에 전념하느냐다. 재가자라도 삼매를 닦고 있다면 이 말씀은 그 사람에게 적용된다.
삼매를 닦지 않는 사람은 어떨까? 그냥 원치 않는 생각이 따라다녀서 괴로운 사람이라면? 그런 경우에도 이 방법이 통할까? 거기까지는 경이 말하지 않는다. 다만 내 경험으로는 삼매를 위한 훈련으로까지 삼지 않고 그때그때 꺼내 써도 쓸모가 있었다. 다섯번째까지 거의 가 본 적이 없다. 대개 그 앞에서 끝났다. 원치 않는 생각에 시달리는 사람이라면 이런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아 두면 좋겠다.
이 포스팅에서 인용한 경전
- 《맛지마 니까야》 〈위딱까산타나 경〉(MN 20), “The Relaxation of Thoughts” — 타니사로 스님 역, Dhammatalks